집 안은 시원해졌고, 복도는 더워졌다.
서울 용산구의 한 아파트 공용복도에 에어컨 실외기가 들어섰다는 사연이 올라왔다.
그냥 잠깐 내놓은 것도 아니었다. 실외기가 돌아갈 때마다 바닥이 울리고, 한 주민은 새벽에 지진이 난 줄 알고 깼다고 했다.
더 황당한 대목은 따로 있었다.
같은 집이 지난해에도 복도에 실외기를 설치했다가 주민 항의를 받고 치웠다는 주장이다. 올해 다시 등장한 이유를 묻자 돌아온 답은 ‘집이 좁아서’였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외기는 며칠 뒤 철거됐다.
그런데 이걸 조금 유별난 이웃의 민폐로만 보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된다.
아파트 복도는 누군가의 현관 앞이면서, 동시에 모두의 대피로이기 때문이다.
복도 한복판에 실외기가 들어왔다
사연은 7월 30일 중고거래 플랫폼의 동네 게시판에서 시작됐다.
작성자는 며칠 전부터 복도 한복판에 실외기가 설치됐다고 했다. 가동할 때 나는 소리와 진동 때문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불편을 겪었다는 게 글의 요지였다.
에어컨 실외기는 실내에서 빼낸 열을 바깥으로 내보내는 장치다. 막힌 복도에서 작동하면 소음과 진동뿐 아니라 뜨거운 바람도 그대로 공용공간에 남는다.
내 집을 시원하게 만들면서 그 열기와 소음을 이웃에게 넘기는 셈이다.
작성자는 관리사무소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여러 매체가 사연을 전했고, 며칠 뒤 해당 세대가 실외기를 철거했다는 후속 내용도 나왔다.
일단 눈앞의 문제는 정리된 셈이다.
다만 현재 공개된 내용은 온라인 게시글과 이를 인용한 보도를 바탕으로 한다. 정확한 복도 폭이나 설치 방식, 관리사무소의 조치 내용, 해당 세대의 입장까지 확인된 것은 아니다.
민폐라고만 부르기엔 문제가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소음과 진동이다.
실외기는 압축기와 팬이 계속 움직인다. 설치 상태가 불안정하거나 벽·바닥으로 진동이 전달되면 같은 층 주민에게는 층간소음과 비슷한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열기다.
실외기에서 나오는 바람은 단순한 환풍이 아니다. 냉방 과정에서 나온 열이 섞여 있다. 환기가 잘되지 않는 복도라면 한 세대의 편의를 위해 공용공간 전체가 더 답답해질 수 있다.
마지막은 대피 문제다.
평소에는 실외기 옆으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화재로 연기가 차고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순간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방시설법은 피난시설 주변에 물건을 쌓거나 장애물을 설치해 피난과 소방활동을 방해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실제 위반 여부는 실외기의 크기와 위치, 남은 통로 폭 등 현장 상황에 따라 판단되지만, 통행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피난에 지장을 주는 장애물로 판단되면 소방당국이 필요한 조치를 명할 수 있고, 위반 행위에는 최대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내 집 앞이지만 내 공간은 아니다
이런 갈등이 생길 때 자주 나오는 말이 있다.
“우리 집 앞인데 뭐가 문제냐”는 말이다.
하지만 여러 세대로 이어지는 복도와 계단은 전유공간이 아니라 공용부분이다. 현관문과 가까이 있다고 해서 그 공간을 개인 창고나 설비실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는 해당 아파트 관리규약과 시설 구조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확인할 곳은 관리사무소다.
사진과 영상, 가동 시간, 소음과 진동이 발생한 시간을 남기고 관리주체에 정식으로 조치를 요청하는 편이 낫다. 대피로를 실제로 가로막거나 소방시설 이용을 방해한다고 판단되면 관할 소방서나 안전신문고를 통해 현장 확인을 요청할 수도 있다.
화가 난다고 전선을 자르거나 실외기를 임의로 옮기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려다 재물손괴나 추가 분쟁으로 번질 수 있어서다.
최근 지어지는 공동주택에는 세대 안에 냉방설비 배기장치를 둘 공간을 마련하도록 한 건설 기준도 있다. 다만 이는 공동주택을 지을 때 적용하는 기준이고 승인 시기와 구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래된 아파트에 실외기 공간이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사정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공용복도를 먼저 차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관리주체와 설치 가능한 위치를 협의하는 과정이 먼저다.
결국 철거됐지만, 끝난 건 아니다
이번 실외기는 주민 항의가 알려진 뒤 철거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사연대로라면 지난해에도 설치했다가 치웠고, 올해 다시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 번 치우게 하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복도에 자전거와 유모차를 두는 일부터 운동기구, 쓰레기, 에어컨 실외기까지. 물건은 다르지만 출발점은 비슷하다.
현관문 밖 공용공간을 내 집의 연장처럼 생각하는 순간, 다른 주민의 통행과 안전은 뒤로 밀린다.
관리사무소도 민원이 들어올 때만 잠깐 치우게 하는 데서 멈추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 관리규약을 분명히 안내하고, 반복 설치나 적치가 생기면 기록을 남겨 일관되게 조치할 필요가 있다.
이번 일은 실외기 한 대가 철거되며 일단락됐다.
하지만 여름마다 비슷한 사연이 다시 나온다면, 정말 정리해야 할 것은 실외기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 집 앞과 모두의 복도 사이에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 아파트 공동생활의 기준도 함께 정리돼야 한다.